이재명의 AI 선언과 트럼프 리딩방… ‘대통령’의 두 얼굴이 묻는 리더의 도

2026년 7월 25일, 이재명 대통령의 AI 선언과 트럼프 대통령의 리딩방 논란을 노자의 '무위'와 '자연' 개념으로 풀어낸다. 강한 카리스마가 능사가 아니라, 리더 없이도 저절로 굴러가는 생태계를 만드는 것이 진정한 통치

샌프란시스코와 월가에 동시에 뜬 ‘대통령’이라는 이름

2026년 7월 25일, 지구 반대편 두 도시에서 ‘대통령’이라는 단어가 다른 울림으로 번졌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이재명 대통령이 젠슨 황 엔비디아 CEO, 샘 올트먼 오픈AI CEO, 그리고 삼성·SK·현대차·네이버 수장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샌프란시스코 AI 선언’을 발표했다. 이 대통령은 “인공지능 시대에 대체불가능한 글로벌 AI 공급망 핵심국가로 도약하겠다”고 천명하며 앤트로픽의 다리오 아모데이 CEO에게는 “한국을 아시아 AI 인프라의 핵심 거점으로 삼아 달라”며 구체적인 투자를 요청했다. 반면 월가에서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SNS 게시물을 다른 이용자보다 먼저 받아볼 수 있는 월 1억 5천만 원짜리 리딩방 상품이 논란에 휩싸였고, 이란에 대해 “합의가 이뤄지지 않으면 즉각 군사행동에 나설 수 있다”고 경고한 그의 발언이 중동의 군사적 긴장을 높이고 있었다. 한쪽은 거대한 산업 생태계를 그리는 청사진으로, 다른 한쪽은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 한마디가 즉각적인 부와 공포로 치환되는 풍경이다. 같은 직함, 그러나 너무 다른 이 두 장면이 가만히 포개어 보게 만든다. ‘통치한다’는 것의 오래된 비밀을.

물 흐르듯, 때로는 바람처럼

노자는 『도덕경』에서 가장 뛰어난 통치자의 모습을 네 단계로 나누어 말한 바 있다. 최상의 통치자는 백성이 ‘그런 사람이 있구나’ 정도로만 알 뿐이며, 그 다음은 백성이 칭송하고, 그 다음은 두려워하며, 최악은 멸시한다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 위계에서 ‘무엇을 많이 하는가’는 위대함의 기준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최상의 경지는 어떤 의도적인 과시나 강제 없이도 모든 것이 저절로 잘 돌아가게 만드는 상태다. 인위적인 조작을 걷어내야만 비로소 각 사물과 사람이 본래 지닌 가능성을 온전히 발휘한다는, 이른바 ‘무위(無爲)’의 통치다. 이 대통령이 샌프란시스코에서 보여준 행보도 그런 관점에서 보면 한 편의 ‘무위’에 가까워 보인다. 정부가 직접 AI를 만들겠다고 나서는 대신, 글로벌 기업들이 스스로 모여들 수밖�에 없는 ‘공급망’이라는 판을 깔아준 것이다. “대체불가능한 핵심국가”라는 말을 화려한 외교 수사로만 듣기보다, 누구도 쉽게 흔들 수 없는 생태계 자체를 만듦으로써 국가의 안위를 도모하겠다는 전략으로 읽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반면 트럼프 대통령의 리딩방을 구독하는 월가의 트레이더들은 대통령의 한마디 한마디에 목숨을 건다. SNS 한 줄에 주가가 춤추고, 군사 위협 한마디에 유가가 요동친다. 이는 강력해 보이지만, 노자가 보기에 이 통치는 ‘두려움’에 기대어 있다. 구성원이 리더의 일거수일투족을 실시간으로 해석하고 반응해야 하는 사회는 언제나 불안에 휩싸이기 마련이다. 실제로 1억 5천만 원짜리 정보를 사는 행위 자체가 예측 불가능성에 대한 공포의 반영이 아닐까. 마치 내일 날씨마저 한 사람의 기분에 달려 있다는 듯한 체제에서는 진정한 신뢰가 싹트기 어렵다. 노자는 말했다. 억지로 붙잡으려는 자일수록 손아귀가 아프고, 놓친 뒤에는 더 큰 상실감에 괴로워한다고. 한 사람의 ‘말’에 시장 전체가 매달리는 강력함은, 어쩌면 체제의 취약함을 반증하는 또 다른 거울일 것이다.

태상의 통치는 그저 자연스러울 뿐이다

太上 下知有之 其次 親而譽之 其次 畏之 其次 侮之 功成事遂 百姓皆謂我自然 — 「道德經 17장」
태상 하지유지 기차 친이예지 기차 외지 기차 모지 공성사수 백성개위아자연

가장 뛰어난 통치자일수록 백성은 그저 그가 있다는 사실만을 알 뿐이다. 공이 이루어지고 일이 다 끝났을 때, 백성들은 “우리가 스스로 그렇게 만들었다”고 말하게 된다는 뜻이다.

권력이라는 그릇, 어떻게 써야 하는가

노자는 이 구절에서 ‘자연(自然)’이라는 말을 쓴다. 흔히 자연을 산이나 바다 같은 외부 경관으로만 생각하지만, 노자가 말한 자연이란 ‘스스로 그러한 상태’, 곧 어떤 외부의 강제나 작위가 더해지지 않은 자기만의 본래 모습을 뜻한다. 위대한 통치라는 것은 결국 그 일을 이루고 나서도 “당신이 해냈군요”라는 찬사가 아니라 “우리가 해냈습니다”라는 자발적인 주인의식을 남기는 데에 성패가 달려 있다는 가르침이다. 강의실에서 학생들에게 이 대목을 설명할 때면 나는 이렇게 묻곤 한다. 당신이 속한 조직의 리더가 휴가를 떠났는데도 모든 일이 평소처럼 척척 굴러간 적이 있는지, 아니면 리더의 부재에 모두가 허둥댔는지. 그 안정감의 차이가 바로 ‘자연’의 유무다.

오늘 뉴스에 비추어 보면 이 구절은 한층 선명해진다. 이 대통령의 AI 선언에서 가장 빛나는 대목은 재계 총수와 글로벌 빅테크 CEO들이 한자리에 모여 마치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연합이나 하는 듯한 분위기를 연출했다는 점이다. ‘국가가 시켜서’가 아니라 ‘나는 이 흐름에 올라타야 손해 보지 않겠다’는 공감대가 형성된 자리였다는 증거다. 이것이야말로 노자가 말한 “공이 이루어지고 백성이 스스로 그렇게 되었다고 말하게 하는” 경지에 다가서는 장면이 아닐까. 물론 이 이면에 얼마나 많은 협상과 치밀한 전략이 깔려 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표면 위로 드러난 모습은 인위로 밀어붙이기보다 모두가 자발적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구조를 만드는 데 집중한 리더십으로 보인다.

트럼프식 강력한 카리스마가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문제는 그 강력함이 오직 한 사람의 ‘말’과 ‘위협’이라는 가느다란 끈에만 의존할 때 발생한다. 시장이 안정되기 위해서는 예측 가능한 규칙이 필요한데, 트레이더들이 수십억 원을 들여 한 사람의 입을 실시간으로 감시해야 한다면, 그것은 시장의 법칙이 아니라 군주(君主)의 기분에 따라 움직이는 불안정한 구조다. 노자는 이런 상태를 ‘겁을 주어 다스리는 차악(次惡)’이라고 진단했을 것이다. 진정한 리더의 ‘힘’은 자신이 없을 때도 구성원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원칙에서 나온다. 나는 이 ‘그릇’의 차이가 결국 오늘날의 기술 패권과 경제적 불안이라는 결과의 차이로 이어지고 있다고 본다.

캠퍼스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면, 조별 과제 하나만으로도 리더십의 양극단을 보게 된다. 모든 걸 혼자 떠맡고 지시하는 팀장은 과제가 끝나는 순간 팀원들의 반발심과 냉소를 얻기 십상이다. 반면 역할을 부여하고 자율적으로 움직이게 한 팀장은 최종 발표 때 팀원들 모두가 ‘우리가 해냈다’는 표정을 짓는다. 한 나라의 대통령도 그 본질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구성원이 자발적으로 움직이는 판을 깔아줄 것인가, 아니면 나의 결정만을 유일한 답으로 남길 것인가. 오늘 ‘대통령’이라는 한 단어에 비친 두 개의 초상은 한낱 권력의 기술을 넘어, 우리가 어떤 공동체를 바라는지 조용히 묻고 있다.


90년대생 학생이 수업 뒤에 내게 건넨 질문이 떠오른다. “교수님, 그러면 대통령이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건가요?” 그 물음에 나는 답지처럼 대답했던 것 같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아니라, 모두가 ‘자연’이라고 믿을 만큼 완벽한 무대 뒤의 작업을 하는 것이라고. 오늘 아침 샌프란시스코와 월가의 온도 차를 지켜보며, 그 학생의 표정이 다시 떠올랐다. 지금 내 곁의 리더는 어떤 무대를 세우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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