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을 ‘AI로’ 하려는 시대, 그 믿음 뒤에 숨은 우리 마음

오늘, ‘AI로’가 현실을 만드는 순간들
오늘 2026년 7월 28일, 주요 뉴스를 훑다 보면 ‘AI로’라는 단서가 이토록 많은 장면을 관통하고 있음을 실감한다. 삼성전자는 AI 기반 고효율 절전 기술과 친환경 소재를 적용한 ‘비스포크 AI 무풍콤보 프로 벽걸이’ 에어컨과 ‘비스포크 AI 김치냉장고’로 생활가전 부문에서 상을 받았다. 신한금융은 AI 에이전트 개발 역량을 갖춘 실무형 인재 양성에 초점을 맞춘 ‘신한 커리어넥스트’ 모집을 시작했고, IBK기업은행은 하반기 조직개편에서 AI 전환 추진 체계를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그중에서도 유난히 눈길을 끈 것은 2조 4천억 원을 투입하는 ‘국가 AI컴퓨팅센터’가 내달 3일 전남광주 해남에서 첫 삽을 뜬다는 소식이다. 작은 어촌 마을이 거대한 컴퓨팅 인프라의 중심지로 바뀌는 장면은 우리 사회가 ‘AI로’ 무엇을 해내겠다는 의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런데 이 장면이 조금 낯설게 다가왔다. AI가 기술을 넘어 하나의 시대정신이 된 지금, 우리가 ‘AI로’라는 말에 담는 것은 ‘수단’의 의미를 훌쩍 넘어선 듯하다. 마치 모든 난제를 ‘AI로’라는 공식에 대입하면 답이 나올 것만 같은 조용한 확신. 나는 오늘 이 믿음의 이면을, 동양 인문학의 오래된 시선으로 한 번 들여다보고 싶었다.
AI라는 도구를 넘어 하나의 ‘길’을 믿는 마음
‘AI로’라는 표현이 이토록 자연스러워진 배경에는 흥미로운 심리적 전환이 숨어 있다. AI는 더 이상 주어진 작업을 처리하는 도구가 아니다. 그보다는 우리가 염원하는 ‘더 나은 상태’로 데려다줄 길 혹은 방법 그 자체로 받아들여진다. 에너지 문제를 ‘AI로’ 해결하고, 금융 서비스의 미래를 ‘AI로’ 연다. 심지어 사람을 키우는 교육마저 ‘AI로’ 실무형 인재를 양성한다고 말하는 시대다.
동양 사상, 특히 유가(儒家)와 도가(道家)에서는 어떤 대상을 ‘길’로 받아들이는 순간 뒤따르는 위험을 여러 번 경고해 왔다. 어떤 하나의 방법론이 절대적인 효용을 지녔다고 믿으면, 사람은 그 길이 닿지 않는 영역을 무시하거나 왜곡하기 시작한다. 장자가 말했듯, 사람들은 무엇을 ‘쓸모 있다’고 판단하는 순간 그 반대편에 있는 ‘쓸모없음의 쓸모’를 망각한다. 지금 우리가 AI라는 하나의 길에 쏟는 기대와 투자는 어쩌면 어떤 망각을 대가로 치르고 있는지 모른다.
더 깊이 들어가 보자. ‘모든 것을 AI로 하려는’ 태도에는 불확실한 세상에 대한 깊은 불안이 담겨 있다. 인간의 감정은 변덕스럽고, 사람의 판단에는 오류가 있으며, 경험은 언제나 불완전하다. 그러나 AI, 특히 방대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하는 컴퓨팅 시스템은 이런 혼란을 깔끔하게 정리해 줄 것만 같은 느낌을 준다. 국가적 차원의 2조 4천억 원 투자에는 ‘인간적인 것을 넘어서려는’ 실존적 염원마저 섞여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문제는 그렇게 집단적으로 어떤 특정한 방식을 절대화할 때, 인간은 자기 손에 쥐지 못하는 다른 모든 가치들을 점점 멀리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노자가 일러준, 억지로 이루려는 자와 진짜 이루어진 것의 역설
이쯤에서 노자(老子)의 오래된 말을 하나 꺼내보는 것이 좋겠다. 『도덕경(道德經)』 38장에는 이런 구절이 등장한다.
上德不德, 是以有德; 下德不失德, 是以無德。 — 「道德經 38장」
상덕부덕, 시이유덕; 하덕불실덕, 시이무덕.
“높은 덕은 덕스러움을 내세우지 않으니, 그러므로 덕이 있다. 낮은 덕은 덕을 잃지 않으려 하니, 그러므로 덕이 없다.”
이 구절에서 노자가 말하는 ‘덕(德)’은 단순한 도덕적 선함이 아니다. 어떤 사물이나 현상이 본래의 생명력을 온전히 구현하는 상태를 뜻한다. 꽃이 억지로 화려해지려 하지 않고 그냥 피어날 때, 그곳에 건강한 덕이 깃든다. 반대로 덕을 ‘드러내고 지키려는’ 행위 자체가 그 생명력을 왜곡한다는 것이 노자의 통찰이다.
‘잘하려는 마음’이 ‘잘됨’을 밀어내는 아이러니
노자의 이 문장은 공자와 맹자가 그러하듯 어떤 위대한 깨달음을 선언하는 방식이 아니다. 오히려 젠틀하게 우리의 마음 습관을 흔든다. 높은 덕(上德)을 가진 사람은 자신이 덕스럽다는 사실에 무심하다. 자신이 베푼 선행을 세지 않고, 조용히 물 흐르듯 자리를 지킨다. 바로 그 무심함 때문에(是以) 덕이 온전히 흘러넘친다. 반면 낮은 덕(下德)에 머무른 사람은 덕스러움을 놓치지 않겠다는 강박에 사로잡힌다. 선행을 기록하고 증명하려 하며, 덕이라는 간판을 붙이고 손님을 맞이한다. 그 치열한 의도 속에서 정작 본질적인 덕의 기운은 스며 나갈 틈을 잃고 만다.
자, 이 논리를 오늘의 트렌드로 가져와 보자. ‘AI로’ 모든 것을 해내려는 이 시대의 태도를 어떻게 읽을 수 있을까. 기업들은 AI를 탑재한 가전제품을 통해 ‘절전’과 ‘친환경’을 이야기한다. 시중은행들은 AI를 앞세워 ‘중소기업 금융 지원’의 의지를 천명한다. 국가는 천문학적인 예산을 들여 AI 컴퓨팅 센터를 세운다. 이 모든 노력은 분명 세상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겠다는 ‘덕스러운 의지’다.
하지만 노자의 시선으로 보면, 그 의지가 너무 완벽하게 수치화되고 간판처럼 내걸리는 순간 조심할 필요가 생긴다. 마치 ‘AI로’라는 접두사가 붙은 서비스가 지나치게 많아질수록 정작 그 제품과 서비스를 사용하는 사람의 진짜 생활이 얼마나 생기 있게 바뀌는지는 뒷전으로 밀리는 현상은 없는지 묻게 된다. 2조 4천억 원의 프로젝트 발표가 정작 해남 바닷가에 사는 분들의 삶을 어떤 호흡으로 변화시킬지는 단 하나의 기사도 말해 주지 않았다. ‘하지 않으려는 마음’, 즉 내가 지금 덕을 베풀고 있다는 생각을 비우는 태도야말로 진짜 기술의 완성이라는 노자의 말이 이상하게 겹쳐지는 순간이었다.
이제, ‘AI로’ 하기 전에 한 번 더 스스로에게 묻기
나는 강의실에서 학생들에게 종종 이렇게 묻곤 한다. “만약 당신이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잘해주고 싶다면, 그 마음을 매 순간 상대방에게 증명할 필요가 있을까요?” 대답은 십중팔구 “아니요”다. 오히려 자신의 ‘잘함’이 부각될 때 상대는 그 호의를 부담스럽게 느끼기 마련이다. 조직과 사회도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가 무언가를 ‘AI로’ 해낼 때마다, 그것이 진짜 덕업(德業)이 되려면 나는 지금 무엇을 ‘이루려고 내세우고 있는지’를 냉철하게 들여다볼 일이다.
오늘 하루, 우리는 수많은 결심을 ‘AI로’라는 단어로 포장할 것이다. 더 효율적인 시스템을 만들고, 더 똑똑한 인재를 키우며, 더 지속 가능한 지구를 약속할 것이다. 그럴수록 노자가 2,500년 전에 들려준 목소리를 잊지 않았으면 한다. 진짜 길은 언제나 살짝 비켜선 곳에서 조용히 놓여 있으며, 가장 높은 수준의 기술은 마치 기술이 아닌 것처럼 자연스럽게 우리 삶에 녹아든다는 이치를 말이다.
오늘도 무언가를 ‘AI로’ 바꾸겠다고 결심하기 전에, 우리가 진짜 놓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인지 한 번쯤 멈춰 생각해 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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