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 612만 원의 무게, 건보료 개편이 우리에게 묻는 ‘균형’의 감각

초고소득자의 보험료가 오른다, 낯선 숫자 뒤에 숨은 질문
2026년 7월 26일, 오늘 아침 경제 뉴스의 머릿글을 장식한 키워드는 단연 ‘건보료’였다. 보건복지부가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건정심) 산하 소위원회에 보고한 부과 체계 개편안에 따르면, 건강보험료의 상한선이 현행 월 459만 원에서 612만 원으로 대폭 인상된다. 대상은 소득 상위 0.04% 약 7,000명. 반대로 저소득층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최저 보험료는 최저임금과 연동하여 현실화한다는 계획이다. 대략 2029년까지 단계적으로 이 조치를 적용한다고 한다.
언뜻 보기에 이 소식은 초고소득 직장인들에게 ‘세금 폭탄’을 가하는 정책으로 읽힌다. 하지만 이 숫자들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월급 1억을 벌든 10억을 벌든 똑같은 한도로 보험료를 매기는 사회는 과연 공정한가?’ 이번 개편안은 단순한 증세가 아니라, 우리가 함께 돈과 책임, 그리고 연대의 감각을 어디까지 나눌 수 있는지 시험대에 올린 것이다.
공동체의 그릇은 얼마나 커야 하는가
동양 사상에서 ‘재화의 분배’는 종종 인간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었다. 공자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군주가 재물을 탐하지 않아야 백성이 도둑질하지 않는다.” 논어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단순히 탐욕을 경계하는 훈계가 아니다. 통치자, 즉 공동체의 규칙을 정하는 이가 먼저 자기 몫을 덜어내는 모습을 보일 때, 비로소 사회 구성원이 믿음을 갖고 제 몫을 지킨다는 의미다.
오늘의 건보료 개편을 보며 나는 이 오래된 지혜가 떠올랐다. 개편안의 핵심은 ‘상한선을 푼다’가 아니라 ‘책임의 상한선을 다시 긋는다’는 데 있지 않을까. 현행 제도는 소득이 아무리 높아도 일정 금액 이상으로는 보험료를 낼 수 없도록 상한을 쳐 두었다. 마치 “이 그릇 이상은 담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셈이다. 그런데 그릇의 크기는 누가, 어떤 기준으로 정해야 할까. 이번에 상한선을 올린다는 것은 공동체의 그릇을 조금 더 키우겠다는 의지다.
주목할 점은 이것이 상위 0.04%에게만 해당되는 논의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고소득 일용직 근로자가 그간 재산이 많음에도 최저 보험료만 내던 구조를 바로잡겠다는 대목에서 우리는 ‘공정’이라는 단어의 무게를 다시금 느낀다. 소득이 불규칙하다는 이유로, 혹은 제도의 틈새에 있었다는 이유로 아무리 많은 돈을 벌어도 지역가입자 반값 수준으로만 부담했던 관행. 손을 본다는 소식은, 어쩌면 우리 사회가 오랫동안 외면해온 ‘수평적 공정’에 대한 고백일지도 모른다.
“백성을 다스리되 물처럼 한다”는 말의 무게
上善若水 — 「道德經 8장」
상선약수
“가장 높은 선은 물과 같다.”
노자의 『도덕경』 8장에 등장하는 이 짧은 문장을 건보료 뉴스 앞에서 펼쳐 든 이유는 무엇일까. 노자가 말하는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며, 둥근 그릇에 담기면 둥글게, 네모난 그릇에 담기면 네모나게 자신을 바꾼다. 그런데 이것은 주체성 없는 굴복이 아니다. 오히려 모든 형태를 포용하는 ‘조건 없는 수용’이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르기 때문에 온갖 더러움도 씻어내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이 더러워지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제도를 설계하는 이의 자세가 바로 이러해야 하지 않을까. 나는 강의실에서 학생들에게 이렇게 묻곤 한다. “여러분이 만약 연봉 10억을 받는 전문직이라면, 지금보다 보험료가 두 배 가까이 오른다는 소식에 기분이 좋겠습니까?” 대부분 웃으며 고개를 젓는다. 그렇다면 다시 묻는다. “그럼 그 초과분이 뇌종양으로 투병 중인 아이의 수술비로 쓰인다면?” 그러면 표정이 바뀐다.
이것이 바로 제도가 물처럼 흘러야 하는 이유다. 엄격한 소득 비례의 잣대만을 고집하면 차가운 칼날이 되지만, 그 사이에 ‘사람의 온기’라는 흐름을 한 방울 섞는 순간 공동체는 비로소 살아 움직인다. 이번 개편안은 그 수많은 이해관계 사이에서 “어디까지가 합리적 부담인가”를 묻는 사회적 대화의 시작점이다. 필자 생각에, 612만 원이라는 숫자 자체보다 중요한 것은 그 숫자를 둘러싸고 우리가 어떤 이야기를 나누느냐다.
균형이란, 한쪽을 희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함께 오래 가는 것
노자의 물에 이어 떠오르는 또 하나의 문장이 있다. 공자의 제자 유자가 한 말이다.
禮之用 和爲貴 — 「論語·學而」
예지용 화위귀
“예의 쓰임은 조화로움이 귀중하다.”
유자가 말한 ‘예’는 단순한 예절이나 의식 절차가 아니다. 이것은 사회 구성원들이 암묵적으로 동의한 규범, 제도, 문화 전반을 아우르는 개념이다. 그리고 그 제도를 운영하는 가장 아름다운 덕목은 ‘화(和)’, 즉 조화라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조화는 모두가 똑같아지는 평균이 아니다. 그것은 노래를 부를 때 소프라노와 베이스가 서로 다른 음을 내면서도 하나의 화음을 이루는 것에 가깝다.
부과 체계 개편에서 내가 특히 눈여겨본 대목은 하한선을 최저임금에 연동하겠다는 발언이다. 지금까지 최저 보험료는 현실의 생계와 동떨어져 있었다. 생활비를 쪼개 한 달에 2만 원도 안 되는 보험료를 내던 이웃들에게, 이번 조치는 “그동안 당신의 부담이 너무 컸다”는 작은 사과이기도 하다. 상한선은 올리고 하한선은 현실에 맞춰 조정하는 이 이중의 움직임은 마치 음악에서 지나치게 높은 음을 살짝 낮추고, 너무 낮아 잘 들리지 않던 음을 조금 키워 아름다운 화음으로 만드는 과정과 닮았다.
초고소득자에게 부담이 늘어나는 것을 단순히 ‘부자 증세’로만 몰아가는 것은 위험하다. 그보다는 “우리가 만든 울타리 안에서 오래도록 아프지 않고 함께 살기 위한 균형 찾기”라는 표현이 더 정직할 것이다. 어쩌면 이번 개편은 우리 모두가 신경 쓰지 않으면 무너져 내리는 일상의 접점, 즉 ‘건강’이라는 공유지를 어떻게 지켜나갈 것인지에 대한 사유의 연장선이다.
낮은 데로 임하는 마음
오늘 아침, 뉴스를 스크롤하며 612만 원이라는 숫자가 뜨자 누군가는 부담을 느끼고 누군가는 덤덤할 것이다. 나는 학생들을 떠올렸다. 졸업을 앞둔 제자 하나가 “교수님, 사회에 나가면 결국 다 돈 이야기뿐이네요”라며 실망 섞인 투로 중얼거리던 얼굴이 스친다. 하지만 이 뉴스의 이면에는 돈보다 더 오래된 이야기가 있다. 우리는 어떻게 함께 아플 것이며, 어떻게 함께 나을 것인가. 그리고 그 무게를 누가 조금 더 기꺼이 짊어질 것인가.
노자 식으로 말한다면, 바다가 모든 강물을 받아들이는 것은 자신을 가장 낮은 곳에 두기 때문이다. 오늘의 제도가 단단하면서도 따뜻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은, 바로 그 낮은 마음을 우리 사회가 잊지 않길 바라는 작은 소망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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