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 노인에게는 배움을 청년에게는 투쟁을…도구에 담긴 두 얼굴의 마음

2026년 8월 10일 스마트폰 관련 뉴스에서 발견한 노년층 교육, 노사 갈등, 신제품 트렌드를 인문학적으로 해석합니다. 도구는 결국 우리 마음의 거울일 뿐입니다.

접는 화면과 새로운 배움, 오늘 아침 스마트폰이 건넨 다섯 개의 얼굴

오늘 2026년 8월 10일, 한낮 무더위만큼이나 뜨겁게 스마트폰이 우리 사회 곳곳에서 다른 이야기를 쏟아내고 있다. 코오롱베니트는 경기도 과천에서 IT 취약계층 어르신을 위한 스마트폰 활용 교육 봉사활동을 오늘부터 본격적으로 알리며 호응을 얻고 있다. 한쪽에서는 어르신들이 낯선 화면을 손끝으로 더듬으며 배움을 시작하는 모습이, 다른 한쪽에서는 삼성 갤럭시 Z 폴드8의 사전 판매량을 두고 ‘1030 여성 구매 비율이 전작 대비 두 배로 뛰었다’는 뉴스가 떠오른다. ‘아재폰’이라 불리던 폴더블 스마트폰이 이제는 젊은 여성 소비자들에게 새로운 아이콘으로 스며들고 있다는 분석이다.

그런가 하면 삼성전자 DX 노조는 반도체가 호황을 누리는 와중에도 정작 스마트폰과 가전을 담당하는 DX부문의 부진을 거론하며 회사에 11조 원대의 요구안을 내밀었다고 한다. 애플은 중국 CXMT의 D램을 아이폰에 탑재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는 소식이 들리고, 한국엡손은 스마트폰으로 찍은 학습 자료를 카카오톡으로 전송해 바로 인쇄할 수 있는 ‘스터디 메이트’ 프린터 9종을 출시했다. 다 같은 스마트폰이라는 도구를 두고 벌어지는 이 각기 다른 장면들은, 마치 하나의 기계가 품은 여러 민낯을 보는 듯하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잠시 멈춰 생각해본다. 지금 우리 손안에 쥔 이 작은 유리판은, 단지 기술이 아니라 ‘관계’의 거울은 아닐까.

기술은 사람의 마음을 드러낸다

오늘의 뉴스 다섯 꼭지를 가만히 바라보면, 스마트폰이라는 기술 그 자체보다 더 깊은 지점이 눈에 들어온다. 어르신 교육 봉사에서 보이는 것은 ‘따뜻한 배려’다. 종이 서류와 대면 만남에 익숙한 세대에게 키오스크와 스마트폰은 종종 장벽이 된다. 그 장벽 앞에서 아무 상업적 이해관계도 없이 다가가 손을 잡아주는 IT 기업의 모습은, 도구가 사람을 소외시키는 것이 아니라 연결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반면 작업장 안 노동자들이 11조 원이라는 거대한 요구를 내미는 장면은 또 다른 욕망을 드러낸다. 반도체 사업부가 역대급 호황을 누리며 벌어들이는 수익을 보면서, 상대적으로 부침을 겪는 스마트폰과 가전 부문 노동자들은 “우리 몫은 어디 있느냐”고 묻는다. 여기에는 ‘비교’와 ‘불안’이라는 오래된 인간 감정이 숨어 있다. 고전 시대에도 그랬다. 정치가 잘못되면 백성들이 굶주렸지만, 정작 더 큰 불만은 ‘내 이웃이 나보다 더 많이 가졌을 때’ 생겨났다. 노동의 현장에서도 ‘불공평함’에 대한 인식이 사람의 마음을 가장 크게 흔든다.

여기에 더해 폴드8의 구매 연령층과 성별이 확 바뀌었다는 소식을 보면, 우리는 ‘소속의 욕망’과 ‘정체성 변화’를 엿볼 수 있다. 한때 폴더블폰은 두껍고 무거운, 소위 ‘아저씨들의 장난감’이라 불렸다. 이제 젊은 여성들이 그 제품을 자신의 가방에 넣기 시작했다는 것은, 기술이 특정 집단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나를 표현하는 도구’로 다시 태어나고 있음을 뜻한다. 이처럼 같은 기계도 누가, 왜, 어떤 마음으로 사용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의 결을 띠게 된다.

이 모든 뉴스를 관통하는 실마리는 동양 인문학의 오래된 질문, ‘인간은 도구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이다. 스마트폰은 거대한 빅데이터와 AI가 집약된 최첨단 기계지만, 결국 그 위에 밴 것은 우리의 불안과 욕망, 그리고 가끔은 연민이다.

“군자는 사는 데 집착하지 않고, 살 곳에 집착한다”

君子居之,何陋之有 — 「論語·子罕」

군자거지, 하루지유

“군자가 사는 곳이라면, 무엇이 누추하겠는가.”

이 구절은 공자가 동이(東夷)라 불리던 변방의 땅에 살고자 했을 때, 누군가 그곳이 누추하다고 말하자 한 대답이다. 공자 보기에, 어떤 장소나 도구는 그것을 대하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그 빛깔이 달라진다. 거칠고 낡은 집이라도 덕이 있는 사람이 살면 향기가 서려 빛나는 곳이 된다. 반대로 아무리 화려한 집이라도 속이 텅 빈 사람이 거처하면 한갓 사치의 껍데기에 불과할 뿐이다.

나는 오늘 아침, 이 짧은 문장을 스마트폰이라는 ‘터전’에 그대로 적용해본다. 수많은 현대인은 이제 물리적 장소가 아니라 디지털 화면 속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의 ‘거처(居)’는 스마트폰 속 플랫폼이며, 그곳에서의 몸짓과 말, 소비와 소통은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를 고스란히 증명한다.

‘거처’로서의 스마트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옛사람이 말한 ‘군자(君子)’는 물질 자체가 아닌, 물질을 대하는 태도의 완성과 성실성을 강조했다. 스마트폰 같은 도구도 결국 그 자체로는 좋고 나쁨을 가를 수 없다. 누추함과 귀함의 차이는 그것을 쥔 사람이 그 도구로 어떤 인간관계를 맺고, 어떤 사회적 책임을 떠안느냐에 있다.

코오롱베니트의 봉사 장면에서 우리는 도구의 ‘선한 사용’을 본다. IT 기업이 가진 기술력을 지역 어르신들과 나누며, 단순히 돈을 버는 도구가 아닌 이웃을 돕는 손길로 전환한다. 이때의 스마트폰은 더 이상 차가운 칩과 회로의 집합이 아니라, 세대 간의 단절을 녹이는 온기가 된다. 내게 강단에서 만난 한 젊은 학생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교수님, 저는 할머니께 유튜브 보는 법 가르쳐드리다가 처음으로 눈을 마주치고 진짜 대화를 시작했어요.” 도구가 오히려 마음을 열게 한 것이다.

반대로 노조의 요구안에서 보듯, 같은 스마트폰 사업이 때로는 치열한 생존 투쟁과 배분을 둘러싼 갈등의 장이 될 수도 있다. 여기서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노조의 요구가 과하냐 적당하냐가 아니라, 이 모든 것을 만드는 기술 문명 한복판에서 우리가 과연 ‘누추함이 없는 거처’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다. 단지 높은 임금만으로 거처가 누추함을 면할 수는 없다. 공자는 말한다. 거처를 누추하지 않게 하는 것은 물질 자체가 아니라 그 살아가는 자세, 즉 ‘居之’라. 스마트폰이라는 임대 아파트 안에서 우리가 어떤 이웃을 만들고 어떤 수다를 나누고 어떤 정보에 책임을 지고 손가락을 움직이느냐에 따라, 같은 기종의 폰이라도 어떤 이의 거처는 따뜻한 사랑방이 되고 어떤 이의 거처는 찬바람 부는 고시원이 된다.

아침에 눈 뜨자마자 스마트폰 화면을 켜는 당신에게 오늘 생각해보자고 권하고 싶다. 지금 당신의 ‘거처’는 과연 누추하지 않은가, 아니면 있음직한 따뜻함을 조금씩 잃어가고 있는가.

조용히 던지는 질문 하나

8월의 한복판, 지금 이 순간도 우리 곁에는 최신 폴드폰이 있고,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낯선 스마트폰이 있으며,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밀린 월급 명세서와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얽힌 대상이다. 그 모든 모순을 품은 채 기술은 멈추지 않고 나아간다. 묻고 싶다. 당신의 스마트폰은 오늘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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