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경제진흥원과 우리은행의 맞손, 왜 ‘버리는 사람 없는 사회’를 떠올리게 할까

서울경제진흥원과 우리은행의 청년 금융교육 협력을 노자의 '무기인(無棄人)', 즉 버리는 사람이 없는 사회라는 관점에서 재해석합니다. 금융 사각지대에 대한 동양철학적 성찰을 담은 글.

금융교육 사각지대를 메우는 손길 하나가 뉴스가 된 까닭

오늘 아침 뉴스는 서울경제진흥원(SBA)과 우리은행이 청년과 취약계층을 위한 맞춤형 금융교육을 함께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지난 13일에 맺은 업무협약이 14일 자로 여러 매체를 통해 보도된 건데요. 금융사기 예방법, 자산관리 같은 실생활에 밀착한 교육을 통해 이른바 ‘금융소외계층’의 역량을 키우겠다는 계획입니다. 언뜻 보면 요즘 흔한 기관 간 협약식 하나쯤으로 지나칠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이 소식을 곱씹으며 문득 한 대목에 시선이 멈췄습니다. 한 기사는 이 협력을 두고 “청년 금융교육 사각지대 줄인다”고 표현했고, 다른 기사는 “금융소외계층의 금융역량 제고를 지원한다”고 적었습니다. 사각지대, 소외. 이 말들은 누군가 사회라는 공동의 그물에서 빠져나와 있거나, 아예 그 그물에 걸리지도 못한 채 내버려져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경제 논리가 더 정교해질수록, 어쩌면 우리는 중심에서 밀려난 이들을 더 잘 보지 못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협약은 단순한 교육 제공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이들’을 다시 보겠다는 태도의 선언처럼 읽혔습니다.

그물에 걸리지 못한 자들 — 왜 우리는 누군가를 잊고 살게 되는가

동양 사상은 예부터 공동체의 가장자리에 선 이들을 어떻게 바라볼지 깊이 고민해 왔습니다. 이를테면 맹자는 모든 사람이 본래 지닌 마음의 싹, 곧 ‘사단(四端)’을 이야기하면서 측은지심(惻隱之心)을 그 첫머리에 놓았습니다.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순간 누구나 조건 반사처럼 느끼는 그 안타까운 마음 말입니다. 맹자의 논리는 단순합니다. 이 마음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라고까지 말합니다. 그런데 현대 사회 속에서 우리는 이 측은지심을 어디에 쏟고 있을까요? 좀 더 빠르게, 좀 더 스마트하게 재테크를 하고 금융 상품을 고르는 일에는 열심이지만, 정작 그 방식 자체에 접근조차 할 수 없는 이웃에게는 둔감해지기 쉽습니다.

사실 이번 뉴스에서 말하는 ‘금융취약계층’이라는 말 속에는, 돈의 흐름을 읽는 리터러시 자체가 하나의 생존 기술이 되어버린 시대를 살아내는 이들의 불안이 담겨 있습니다. 단지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보이스피싱에 더 취약해지고, 대출 사기에 더 쉽게 속는 역설이 생겨납니다. 중심의 논리만 따라가다 보면, 그 논리 바깥에 있는 이들은 끝내 배제되고 맙니다. 이쯤 되면 도가(道家)의 노자가 설파했던 경고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늘과 땅이 불인(不仁)하여 만물을 추구(芻狗)로 여긴다고 말한 구절 말입니다. 천지는 특별히 누구를 인자하게 여기지 않으며, 모든 것은 제 역할이 끝나면 길가의 짚으로 만든 강아지처럼 한순간에 버려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냉정하게 들리지만, 근대적 합리성이라는 천지가 작동하는 방식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효율과 생산성만 따지는 시장의 질서 안에서는, 금융 교육조차 ‘가르쳐 줄 가치’가 있는 이들에게 먼저 가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습니다.

바로 그렇기에, 서울경제진흥원과 우리은행이라는 두 공적 성격의 기관이 손을 잡고 먼저 가르침의 손길이 닿지 않던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로 한 오늘의 결정은, 이러한 자연스러운 배제의 흐름을 거스르는 행위로 읽힙니다.

是以聖人常善救人, 故無棄人
시이성인상선구인, 고무기인
그러므로 성인은 항상 사람을 잘 구하니, 버려지는 사람이 없다.

“고무기인(無棄人)” — 버림받지 않는 세상을 꿈꾼 노자의 사회 계약

이 구절은 노자의 「도덕경」 27장에 나오는 말입니다. 앞 구절을 조금 더 끌어오면 이야기가 더 입체적이 됩니다. 노자는 “잘 닫는 자는 빗장을 쓰지 않아도 열 수 없고, 잘 묶는 자는 새끼줄을 쓰지 않아도 풀 수 없다”라고 운을 뗍니다. 이 말은 기술의 근원, 즉 억지스러운 인위(人爲)를 넘어선 자연스러운 쓰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노자는 성인은 이처럼 자연의 도를 본받아 ‘항상 사람을 잘 구해서(善救人) 그러므로 버리는 사람이 없게 한다(無棄人)’고 말합니다. 버리는 물건도 없듯이, 사람에게도 버리는 자가 없다는 뜻이지요.

여기서 말하는 ‘구한다(救)’는 표현을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마치 비 맞는 강아지를 안쓰럽게 우산 속으로 끌어당기듯 위에서 아래로 베푸는 시혜가 아닙니다. 노자의 성인은 모든 존재 내부에 깃든 고유한 결을 읽습니다. 굽은 나무는 굽은 대로, 곧은 나무는 곧은 대로 각기 다르게 쓰입니다. 성인은 억지로 사람들을 하나의 잣대로 휘어잡으려 하지 않기에 아무도 도태시키지 않습니다. 사회라는 틀에 맞지 않아 ‘쓸모없다’고 치부된 이들조차 성인의 눈에는 그 자체로 온전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가르침’이 아닌 ‘쓰임’을 알아보는 일 — 금융 교육의 노자적 접근

자, 그럼 이 「도덕경」의 가르침을 오늘의 금융교육 이야기에 포개어 봅시다. 흔히 사회 취약계층을 위한 교육은 ‘부족한 그들을 정상 궤도로 데려다놓겠다’는 동기에서 출발할 때가 많습니다. 금융을 모르니 가르쳐 줘야 한다는 시선은 어쩌면 무의식중에 그들이 원래 결핍된 존재라는 낙인을 찍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노자의 관점에서 본다면, 진정한 교육이란 그들이 가진 ‘없음’을 채우는 데에만 몰두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그들이 왜 그토록 금융의 허울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들의 삶의 결을 이해하는 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예컨대 소액을 모아 적금을 깨고 빚을 갚으며 하루하루를 버티는 청년에게, 화려한 재테크 강의는 우물에 빠지려는 아이를 보고도 달려가지 못하게 하는 격입니다. 그에겐 자산 증식 이전에, 나조차도 속고 마는 불안을 다스리는 법, 혹은 작은 돈이라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한 절차적 지혜가 절실합니다. 이런 눈높이는 교과서적인 금융학 개론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오로지 상대방의 삶 속으로 들어가 보려는 공감적 태도, 즉 그들의 ‘결’을 읽는 일에서 비롯됩니다.

만약 이번 교육이 일방적인 주입식 강의가 아니라, 청년들이 일상에서 마주치는 금융 문제의 맥락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고, 그 안에서 ‘속지 않는 법’, ‘지키는 법’을 함께 모색하는 자리로 설계된다면, 이는 분명 노자가 꿈꾼 무기인(無棄人)의 현대적 실천이 될 수 있습니다. 사회의 빠른 속도에 적응하지 못하는 이들을 느리다고 탓하지 않고, 교육이라는 ‘자연스러운 끈’으로 슬며시 공동체 안에 붙들어 매는 일이니까요.

노자가 서울경제진흥원에 건네는 질문 하나

오늘의 이 짧은 기사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명료합니다. 사회적 약속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을 탓하는 데서 나아갈 때 비로소 완성된다는 점입니다. 아무리 좋은 정책과 상품도, 정작 도움이 절실한 이들 손에 쥐어지지 않으면 길가의 짚으로 만든 강아지에 불과합니다. 서울경제진흥원의 이번 행보가 일회성 구호에 그치지 않고, 수많은 작은 삶의 결들을 오래도록 응시하는 노력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해 봅니다. 어쩌면 우리 사회의 진짜 성숙도는 ‘금융 이해력’ 평균 점수가 아니라, ‘빗장 없이도 아무도 떨어져 나가지 않는 배움’ 을 얼마나 완성하느냐에 달려 있는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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