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세제 개편, 집은 사는 곳인가 파는 곳인가 | 노자가 본 주거의 본질

“집은 리빙”이라는 말이 무겁게 다가온 까닭
오늘 아침, 구윤철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의 라디오 인터뷰가 뉴스 도처에서 쏟아졌다. 요지는 분명했다. “집은 바잉(buying·구매)하는 게 아니라 리빙(living·거주)하는 것.” 이달 말 발표될 부동산세제 개편안의 방점은 ‘실거주 중심’으로 찍혔고, 보유세와 거래세 사이의 균형을 되찾겠다는 구상이 공개되었다. 시장은 곧바로 술렁였다.
그런데 이 짧은 발언에서 나는 한 단어에 시선이 멈추었다. “균형.” 장관은 두 번이나 그 말을 썼다. 보유세와 거래세의 균형. 여기에 묘한 반전이 있다. 본디 세율이 오르내리는 일은 숫자의 문제다. 그런데 정부가 찾겠다는 것이 고작 숫자의 균형이라면, 왜 굳이 “집은 투자가 아니라 거주”라는 철학적 명제를 전면에 내세웠을까. 어쩌면 이번 개편은 단순한 세율 조정 이상의, 집에 대한 우리 시대의 정의를 다시 묻는 일이 아닐까.
과욕의 시대, 잃어버린 집의 마음
한번 생각해 보자. 우리는 언제부터 집을 ‘보유’한다고 말하게 되었을까. 부동산 앱을 켜면 내가 사는 곳은 ‘자산 포트폴리오’의 일부가 되고, 호가 창을 손가락으로 훑는 동안 내 보금자리는 어느새 거래 가능한 상품으로 탈바꿈한다. 거주라는 구체적 경험보다, 차익이라는 추상적 기대가 더 큰 기쁨과 불안을 주는 이상한 시대다.
동양 철학에는 부富를 논할 때 흥미로운 전제가 있다. 재물 자체가 문제인 적은 없다. 문제는 언제나 ‘지나침’과 ‘집착’이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인간이 집을 초가집에 비유하며 말한 적은 없지만, 그가 가르친 마음의 원리를 주거에 대입해 보면 풍경이 선명해진다. 아무리 화려한 저택을 가졌어도 내 몸이 뉘는 공간은 단 한 평이면 족하다는, 그 소박한 진실 말이다. “족한 줄 알면 욕되지 않는다”는 노자의 말은 검소함을 강요하는 잔소리가 아니라, 인간의 유한한 육체와 무한한 욕망 사이의 괴리를 낱낱이 알고 있었던 통찰이다.
구 부총리가 “‘실거주자 중심’이라는 원칙을 세우겠다”고 말하는 이면에는, 주택 시장이 더 이상 실수요 주체들의 삶을 담는 그릇으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다는 정부의 진단이 깔려 있을 것이다. 필자 생각에, 지금의 부동산 시장 불안은 공급과 수요의 숫자 불일치라기보다는, ‘집다움’의 상실이라는 정서적 위기에 가깝다. 투자 상품이 된 집은 더 이상 쉼터가 되지 못한다. 우리는 오를까 두려워 벌벌 떨고, 떨어질까 불면에 시달린다. 쉬기 위해 마련한 공간에서 가장 잠 못 드는 역설. 참으로 숙명적인 모순이다.
노자의 짧은 문장 하나가 세금보다 무겁다
甚愛必大費 多藏必厚亡
— 『道德經 44장』
심애필대비 다장필후망
“무엇을 지나치게 사랑하면 반드시 큰 소비를 부르고, 많이 쌓아 두면 반드시 크게 잃는다.”
‘비움’은 가난이 아니라 지혜다
이 구절은 노자가 세속의 가치관을 뒤흔드는 대목 중 하나다. 애초에 노자는 전쟁과 가혹한 정치로 백성이 삶의 터전을 잃던 혼란기 춘추전국시대를 살았다. 그 시대에도 땅과 집은 권력과 부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노자가 보기에는, 민심을 떠나 땅을 넓히고 곳간을 채우려는 군주의 욕망은 백성은 물론 자기 자신까지 파멸시키는 ‘과잉된 사랑’에 다름 아니었다.
여기서 ‘심애(甚愛)’는 단순한 애정이 아니다. ‘심할 심(甚)’은 도를 넘는 결핍감을 의미한다. 이미 가졌지만 모자란 듯 더 움켜쥐어야 하는 마음이다. ‘다장(多藏)’은 그러한 심리에서 비롯된 축적 행위다. 노자는 이 둘의 결과를 각각 ‘대비(大費)’와 ‘후망(厚亡)’으로 연결한다. 지나친 소유 욕심은 궁극적으로 자신의 삶 전체를 소비하게 만들고, 그렇게 쌓은 무더기는 오히려 더 큰 상실의 원인이 된다는 뜻이다.
이 가르침을 오늘의 부동산 시장에 비춰 보자. 나는 종종 강의에서 학생들에게 묻는 질문이 있다. 내 월급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대출을 받아 집을 샀다면, 그 집은 나의 소유인가, 아니면 은행의 소유인가. 상당수 학생이 대답을 망설인다. 이 망설임이야말로 ‘다장필후망’의 현대적 얼굴이다. 우리가 주거 안정이라는 본래의 목적을 잊고 자산 가치의 극대화만 좇을 때, 정작 잃는 것은 밤에 편히 잠들 수 있는 마음의 평온과 자유일지도 모른다.
노자가 말하는 올바른 ‘비움’은 무소유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필요 이상의 것을 욕망하여 내 삶의 중심이 휘둘리지 않도록 스스로를 지키는 절제의 기술이다. 이달 말 정부가 발표할 세제 개편안이 정말로 효과를 보려면, 세율 몇 퍼센트가 아니라 바로 이 ‘족함’과 ‘절제’라는 미덕을 시민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신호를 보내야 하지 않을까. 정책은 인간의 마음을 설계할 수 없지만, 인간의 마음이 향할 방향을 제시할 수는 있다. ‘실거주자에게 불이익이 없는 구조’, 그 단순한 명제 속에 노자의 오랜 지혜가 깃들기를 나는 소망한다.
한 평의 편안함, 그 이상의 자유
집은 결국 벽과 지붕이 아니다. 그 안에서 살아가는 나의 시간과 안온함이 집의 실체다. 세제 개편을 앞두고 시끄러운 뉴스 속에서 잠시 멈추어 물어보자. 나는 지금 사는 집에서, 살아내고 있는가.
댓글
댓글 쓰기